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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누리쟈니(Michel Nuridsany, 르피가로지 미술평론가) - 조화 - 2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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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3-12-22 16:17 조회 828hit 댓글 0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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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화 (調和)
 
 
                                                                                 미셀 누리사니 ( Michel Nuridsany, 르 휘가로지 미술평론가)
 
 
 임 동락의 에스끼스( 밑그림)는 대단히 독특한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작품을 위한 이상적인 비젼의 제 조건들이 컴퓨터에 의해서 창조해 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밝게 투사되는 스크린을 통해서 그의 열망과 정열, 절대성 같은 것들이 효과적으로 강하게 투사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장식성에 관하여 우선 분석하여 보는 것은 그의 환경 조각을 이해하는 우회로의 조건이다. 잘 깎여진 풀밭, 때로는 공간 밑바닥까지 펼쳐진 넓다란 들판, 후면에 마치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것 같은 나무 커튼... 이런 자연은 물론 잘 측정되고, 자르고, 가지를 치고 하여 그의 개인적 의미를 뎃상 한 후 그러니까 조각되어진 자연이지만 대단히 자유스럽다. 그 위로 커다란 머리채 같은 구름이 강하게 표현되었다. 마치 보드레르적 << 멋진 구름 >>의 태양 빛처럼 붉은 긴 구름결이 사랑의 그것 같은 촉촉한 공기 속을 배회하거나, 밤에로 미끄러지듯 짙은 청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구름들.
 
 좀 늦은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 장식이란 ? 그것은 바로 이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놓는가라는 명료한 제시의 미학적 조건들로서의 장식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작품을 어떻게 놓을까 라는 측정, 그렇지만 재든 재지 않든 , 이때 잰다고 하는 점을 비껴갈 수는 없지만 임 동락의 경우에는 이것이 근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에스끼스 덕분에 우리는 단숨에 질문의 핵심에 이른다.
 
 이 에스끼스의 중심부에 근엄하게 조각품이 놓여있다. 정면에, 그러나 잊기 쉬운 흔적도 아니면서 더욱 의기양양해하지도 않은 겸손함 속에 의연히 거기에 있다. 중심부에 자리잡았지만 조화롭다. 조각은 장소와 일치하면서 대개는 자연의 바다, , 나무들의 커튼을 배경으로한 열려진 도심의 짜임새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조각은 거기에 통합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야기된다. 우리는 조각( sculpture )에 관하여 말하여야 하는지 , 기념물( monument )에 관하여 말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이 질문은 단순히 의미론적인 것만이 아니다. 가령 많은 임동락의 작품이 대중 공간이나 야외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전 나는 문화부 장관인 쟈크 랑씨의 요청에 따라 도심의 예술품에 관한 <<공중의 요청>>이란 출판물을 낸 적이 있다. 나에게 흥미 있는 질문은 본래 도시다. 옛날에는 도시나 마을에서 기념물들이 제후의 승리 장소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기념물을 설치하는 장소들은 높은 지대였다. 이럴 경우 그 장소는 , 물론 상징적으로 민중을 외곽으로 쫓아버리었고 기념물을 제후의 말 높이만큼 올려 세웠던 것이다. 이태리에서 광장은 안쪽으로 굽어져 있어 기념물은 대중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여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사로잡는다. 이때 제작 방법이 다르게 표현된 특징들이 아주 강하게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나라의 서로 다른 기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러한 황후 장상의 권위와 영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장소를 기념할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임 동락의 기념조각은 시민 공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우리가 리차드 쎄라 라든가 장-삐에르 레이노, 에릭 디에트만, 임 동락 의 작품을 보면 그들은 더 이상 가령 문인수(한국의 조각가)의 조각처럼 건축물의 그늘 속에 놓여지는, 굳이 말한다면 그 양자 사이에 불균형을 이루는, 작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만큼 건축물을 동반한 시각 속에서 이루진 작업은 드물다는 확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시민 공간을 강하게 제시한다. 그들은 도시 공간을 미화 시킨다. 주문은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 의해 뎃상과 마케트로 제출되며 일반으로 재창조되는 과정을 거쳐 조직위원, 집행 위원들과 심사위원들을 통과함으로서 그 격식과 품위가 교차되는 과정을 치른 후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문을 하는 사람이 과거에 예술가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은 일련의 주문에 언제나 따라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그러한 분개할 만한 사례로 미국에서 리차드 쎄라의 작품을 놓는 장소에 관한 시비를 들 수가 있다. 그는 시민들이 늘 상 다니는 공공 장소에 그가 자주 시도했던 것처럼 그의 작품을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면서 비스듬이 설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때 벌어진 상황은 제의도 강경했지만은 대답도 강경한 어조로 나왔는데 시민들은 연합하여 이 작품의 위험성을 주장하며 그것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맞섰다. 이 인상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은 작가의 커다란 분노를 사면서 옮겨졌었다. 조각품, 특히 도심 공간에 설립하는 기념 조각품은 시민에게 희사하는 것이지만 작가에게는 참아야만 하는 습관을 요구하는 어떤 잔인함이 있는 것이다.
 
 대중은 흔히 예술품이 어떤 힘의 상징으로 있을 필요가 있다고 입증되었더라도 자기들 공간에 놓인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팽팽하게 견제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운명적으로 그들의 명성이 덜 손상되기 위해 맞서는 것이리라. 또 다른 예로, 리차드 쎄라는 그의 대단히 뛰어난 작품 <<크라라, 크라라>>를 뛸리리 공원에서의 화려한 전시회를 끝마친 후에 파리 시에 기증하였다. 그 작품은 라데팡스로 옮겼다. 그런데 그것이 시민들의 익숙한 <전망>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작품은 모욕적인 낙서가 함부로 되어 거의 시야가 가려진 교차로 아래쪽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아마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터인데 실로 공무원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지기를 기다리면서 그 행방은 만이 알 것이다.
-삐에르 레이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공공장소에 놓이는 모든 예술품은 대중들의 분노나 못된 표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최소한 땅에서 2m 이상 떨어진 곳에 놓아야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공장소를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는데 이때 왼지 예술작품은 자기들의 영역을 조금은 침입했다고 생각한다. 이점을 감안하여 너무 지적으로 난해하거나 어둠침침하게 보이지는 않는지 혹은 파손되지 않도록 사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러나 한편 퐁피두 센터 옆에 있는 튕글리나 니키의 샘처럼 재미있고 그리고 열려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조화로와야 한다.
 
 ‘조화’,
 이것이야말로 임 동락의 세계다.
 그의 모든 작품은 균형 잡힌 긴장감의 신비로움 속에서 그리고 조용한 자기 진술이 있는 곳에서, 홀륭하게 꽃피운다.
 또는 그 속에 녹아든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거기서 분산된다.
 임 동락의 조각은 어느 낮설은 곳에서도 결코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며 공격적이지도 않으며, 고립되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오케스트라의 핵심부에서 그가 한 솔러(독주자)로서 연주에 참가하듯이 노래를 한다.
 임 동락은 침착하고 부드러우며 차분히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외적인 균형 그 뒤에는 뜨거운 불길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처럼 균형은 매력적인 평형을 이룬다.
 
 임 동락은 지리적으로 거의 대한민국의 중심 지대인 서울의 남쪽, 평원에 위치하고 있는 대전에서 태어나 이미 어릴 때부터 뎃상을 좋아하였고 그래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우리가 만일 그의 이러한 취향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물어 본다면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대답 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아버지는 화가였을까? 교수이며 문인이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고위층이거나 아마추어 화가였을까? 대답은 대단히 단순하고 더욱 평범하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일 뿐이었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그가 예술가적 기량을 키워가고 있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어린 동락이 동무들을 사귀귀도 어려울 정도로 군 주둔지를 옮겨 다녔다. 사춘기를 고독과 방황의 어린 시절로 보낸 이 소년은 미술 책을 보면서 자신을 잊었고 한편 자신을 위하여 유일한 대화의 통로인 뎃상과 그림 그리기로 자신을 지탱하여갔다. 이 시기를 통하여 임 동락은 몇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가령, 나뭇가지를 태워 거칠은 목탄을 얻어냈고 이 숯검정으로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뎃상 하였다. 그가 역시 기억하는 것으로 이 시절에 명암을 나타내 보고 져 하는 정열적 시원이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임 동락의 이력에서는 놀라웁게도 정확한 날자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는 모두 정확한 날자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개인전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단순히 1회 개인전, 2회 개인전, 3회 개인전 등,, 외에 몇일날 그가 태어낳는지 ?
 
 이 시기와 관련하여 그는 수 없는 공모전 수상과 그럼에도 그에 맞먹을 그의 대학 시절의 절망감에 관하여 내게 토로하였다. 그는 3년간의 군 복무기간 동안 공수부대 소속이었고 그래서 그는 점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여기서 그가 파리 비엔날에 참가한 시기를 추측컨데 1980년경이 아닌가 싶다. 그가 정확하게 부산에 정착한 것은 1986년으로 이후그는 야외 조각 심포지움이 조직되었던 미술관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나는 이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일이 있는데 그때 이 조직의 질적 수준과 국제적 만남의 장소로서의 중요성과 토론의 진지함을 가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에게 부산의 무엇이 당신 작품에 영향을 주었느냐고 묻자 그는 즉시 <<자연의 광장>>이라고 대답했다. 바다의 한 부분, 해안의 도시, 자연은 이 도시에 조금밖에는 보여 지지 않는다. 성격이 강한 부산을 <<유쾌한 도시>>로 부르는 것은 쉬기에 대단히 편안하고 일본이 아주 가깝게 이웃하여 부담 없이 드나드는 이도시의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임 동락은 자신의 성격이 결코 고상하고 세련되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원초적이다 란 표현을 한다. 그리고 부산 사람들은 대단히 직설적이다.’라고 덧 부치기도 했다.
 
 고독, 그 자신을 폐쇠 시키는 그리고 아마도 그의 자제할 수 없는 감성적 특징을 강하게 형성하여주었든 성장기는 그러하였다. 그런데 보다 더, 아니면 최소한 그 정도의 과정, 중요한 통관의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회화에서 조각에로의 전향이다. 임 동락은 화가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조각가로 변신한 것은 낮 설은 일 일지모르나 그러나 거기에 응축되고 뭉쳐진 깊은 감성의 전이가 있었음을 우리는 이차원의 공간 속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것은 구상에서 추상에로의 전이과정에서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어린시절의 방황을 알았으며 설혹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지향하는 사랑의 맛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리라.
 
 자유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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